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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해자에게 (13년 재회, 구조적 폭력, 방관의 책임)

by aab415 2026. 4. 25.

가해자는 기억을 지우고, 피해자는 13년째 그날에 살고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드라마 한 편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손이 멈췄습니다. KBS 드라마 스페셜 나의 가해자에게, 한 시간짜리 단편이 이렇게 오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줄은 몰랐습니다.

13년 만의 재회, 그리고 무너지는 구조

3년차 기간제 교사 진우는 새로 부임한 신입 교사 유성필을 보는 순간 얼어붙습니다. 13년 전 자신의 학창 시절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바로 그 얼굴이었거든요. 그런데 더 잔인한 건, 유성필은 진우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직접 봐보니, 이 장면 하나만으로 이 드라마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다 느껴졌습니다.

여기서 드라마가 짚어내는 건 개인 간의 악감정이 아닙니다. 피해자 트라우마(trauma)라는 개념이 핵심입니다. 트라우마란 반복적으로 되살아나는 심리적 외상으로, 피해자는 수년이 지나도 사건 당시의 감각과 감정을 고스란히 재경험하게 됩니다. 진우가 유성필의 얼굴을 보자마자 13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연출은 바로 이 트라우마의 특성을 정확하게 시각화한 것이었습니다.

진우는 기간제 교사입니다. 기간제 교사란 정해진 계약 기간 동안만 임용되는 비정규직 교사를 의미하며, 계약 종료와 함께 고용이 끊기는 불안정한 신분입니다. 이 불안정한 신분이 진우를 흔드는 첫 번째 구조적 장치가 됩니다. 이사장 손녀 희진의 한마디에 교장의 태도가 하루아침에 바뀌고, 진우는 버티고 싶어도 버틸 수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제가 이 대목에서 느낀 건, 이건 단순히 나쁜 학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힘 있는 사람 앞에서 쉽게 침묵하는 구조 전체가 문제였습니다.

학교폭력 피해자가 어른이 되어서도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는 건 통계로도 확인됩니다. 학교폭력 피해 경험이 성인기 우울·불안 장애 위험도를 유의미하게 높인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출처: 한국교육개발원). 진우의 이야기는 픽션이 아니라 현실의 반영입니다.

방관의 구조, 희진이라는 권력

이 드라마에서 제가 가장 무섭게 본 캐릭터는 유성필이 아니라 희진입니다. 이사장의 손녀인 희진은 진우의 정교사 전환이라는 급소를 정확히 찌릅니다. 여기서 정교사 전환이란 기간제 계약직 교사가 정규직 교원으로 임용되는 것을 의미하며, 신분의 안정성이 완전히 달라지는 결정적인 변화입니다. 희진은 이 카드를 협상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직접 봐보니, 희진의 무서움은 폭력성이 아니라 정교함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진우의 과거 학폭 기록을 캡처해 제시하고, 성필이 희진에게 굴복했다는 정보를 흘리며 진우를 심리적으로 고립시킵니다. 이걸 드라마 용어로 표현하면 권력형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스라이팅이란 타인의 현실 인식을 조작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심리 조종 기술로, 피해자가 자신의 판단을 불신하게 만드는 것이 핵심입니다. 희진은 어린 학생이지만 이 기술을 본능적으로 구사합니다.

이 드라마가 날카로운 이유 중 하나는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를 정면으로 다루기 때문입니다. 방관자 효과란 주변에 사람이 많을수록 오히려 개인이 나서지 않는 심리 현상을 가리킵니다. 진우의 과거에서 눈을 감지 않은 건 진우 혼자였고, 현재에서도 성필은 결국 희진에게 굴복합니다. 시스템 안에 있는 어른들이 하나씩 침묵을 선택하는 과정이 너무나 현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드라마가 좀 더 뾰족하게 파고드는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 과거 담임의 외면: 피해자가 유일하게 믿었던 어른이 침묵을 선택했습니다.
  • 현재 성필의 굴복: 한때 정의로운 말을 했던 어른이 생존을 위해 돌아섰습니다.
  • 진우의 흔들림: 피해자였던 사람조차 같은 자리에 서게 되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희진 캐릭터가 너무 만능처럼 그려진다는 비판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보면서 이건 좀 과장된 거 아닌가 싶은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현실의 권력형 가해를 한 인물에 압축해 보여주는 방식으로 읽으면 오히려 효과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한 시간 안에 구조적 폭력을 전부 보여줘야 하는 단편의 한계를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진우가 묻는 것, 그리고 은서가 답하는 것

드라마 후반부에서 제가 가장 오래 멈춰 있었던 장면은 은서가 반성문을 내미는 부분이었습니다. 은서는 진우가 시킨 적도 없는데 자발적으로 반성문을 제출합니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곤란에 처한 선생님을 배려하기 위해서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먼저 다른 사람을 걱정한다는 설정이 너무 먹먹하게 다가왔습니다.

은서가 "도와달라고 말 안 하면 어떻게 아냐"는 진우의 말에 조용히 "저, 안 해봤을 것 같아요?"라고 답하는 장면은 이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대사입니다. 이미 수십 번 도움을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건 침묵뿐이었고, 그래서 체념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학교폭력 피해 학생 중 절반 이상이 주변에 알리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는데, 이 침묵이 단순한 소극성이 아니라 반복된 외면 끝에 학습된 무기력임을 이 장면 하나가 설명합니다(출처: 교육부 학교폭력 실태조사).

진우의 캐릭터가 특히 좋았던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피해자였다고 해서 언제나 용감하게 행동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정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존 본능 앞에서 흔들리는 진우는 현실적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불완전한 주인공이 결국 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피해자라면 마땅히 더 용감해야 한다"는 식의 도덕적 압박을 거부하는 이 드라마의 시선이 저는 의미 있다고 느꼈습니다.

유성필의 마지막 대사, "너도 이제 괜찮잖아"라는 말은 사과 없는 반성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기억조차 못 하는 가해자의 일방적인 종결 선언. 이걸 보는 순간 제 쪽에서 화가 났습니다. 이 드라마가 전달하려는 핵심 감각이 바로 이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 오래 남은 질문은 하나였습니다. 진우는 결국 어떤 어른이 될 것인가. 복수가 아니라 그 선택이 이 이야기의 진짜 중심입니다. 한 시간짜리 단편이 이 질문을 이렇게 무겁게 남기는 드라마는 드뭅니다. 러닝 타임이 부담스럽지 않으니, 학교폭력이나 방관의 구조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한 번쯤 직접 보시길 권합니다. 현재 웨이브, 왓챠, 애플 TV에서 풀 버전으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fTfjL7D8Ff8